안트로프사리모브: 제길, 체험 한번 거하게 했군. 좋아. 이제야 생각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어. 까맣다. 주변이 온통... 검은색이야. 아니, 진짜 검은색이 아닌데. 공허다. 터무니없으리만치 공허해. 아무 색깔도 없어.

안트로프사리모브: 여러분, 들립니까? 안쪽에서 어지러운 환상이 멎었습니다. 이제 앞서 작성했던 소환 규약서를 외우죠.

안트로프사리모브: 오 그대 은자물지시여, 그대를 따르는 이에게 생명과 힘을 내려주시는 이여, 신성한 뜻을 어기는 이에게 죽음과 나약함을 내려주시는 이여. 제가 선조들의 영혼 중에서 나아와 그대에게 질문을 바치나이다.

SAI-001: [대답 없음]

안트로프사리모브: 한번 더. 오 그대 은자물지시여, 그대를 따르는 이에게 생명과 힘을 내려주시는 이여, 신성한 뜻을 어기는 이에게 죽음과 나약함을 내려주시는 이여. 제가 선조들의 영혼 중에서 나아와 그대에게 질문을 바치나이다.

SAI-001: [대답 없음]

안트로프사리모브: 좋아.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3카발라주문서를 읽어보고 곧이어서-

SAI-001: 진실된 인사를 보내오, 전체 속의 인간이여. 내가 여기 있으며 그대의 말을 듣소. 두려워 마시오. 그대의 정신이 정돈되어 쉬이 내게 들린다오. 좋소. 볼 것을 보기에 충분하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아. 아 신이시여. 들립니다. 좋아요. 질문 올리겠습니다. 보자 보자 보자. 규약서에 따라서. 집중해. 첫째 질문입니다. 당신은 천체의 차원에서 왔습니까?

SAI-001: 아니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인과의 차원에서 왔습니까?

SAI-001: 아니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정수의 차원입니까?

SAI-001: 그것도 아니오. 지금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소, 친구여. 나는 어디서도 오지 않았소. 출발하지도 않았으니 도착하지도 않소. 나는 이 세계에서 유래한 동시에 다른 모든 세계에서 유래했소. 나는 불변하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아 신이시여, 신이시여. 이 말 꼭 기록해주십시오, 바깥 사람들. 진정하자. 자, 은자물지시여, 당신은 움직이고 다니지 않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 동시에 존재합니까?

SAI-001: [대답 없음]

안트로프사리모브: 너... 너무 분노하지 않으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공식적인 목적이 있어서 드리는 질문이-

SAI-001: 처음부터 다시 말하겠소. 모든 장소는 같은 곳이고 모든 시간은 같은 순간이며, 모든 것은 동시에 존재하오. 단지 겹쳐 있을 뿐이오. 무지개의 색을 보시오. 각개의 색이 존재하나 서로 겹쳐 있으므로 하얀 빛을 이루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상징일 뿐, 대전체라고 불러야 더 적당할 것이오. 그대가 지각하는 것은 전체의 편린일 뿐이오. 그대의 지각이 제한된 것은 인류가 세상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색깔 중 한 가지 색깔, 그대가 속한 색깔만을 인식하기 때문이오. 하얀 빛에서 한 가지 색깔을 고립시키려면 여과지가 필요하오. 그 여과지가 바로 그대의 세계라오. 그대의 감각이 대전체 속에서 몇 가지 요소를 골라 그대의 세계 속에서 조립하는 것이오. 빨간 것, 푸른 것, 파란 것은 모두 한 자리에 공존하오. 다만 서로를 보지 못할 뿐이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아, 말씀을 알겠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그 '여과지'란 무엇입니까? 인과성을 뜻합니까? 당신은 이 세상의 가능한 모든 역사 안에서 유일합니까?

SAI-001: 훨씬 더 미묘한 질문이군. 그대가 논점을 벗어난다고 느끼오. 역사의 총합을 똑같은 빛깔의 색조가 모든 역사에 발린 것처럼 생각하시오. 그뿐이오. 이것도 순전히 상징이지만, 그대가 빨간 세계에 속한다면 그 때문에 대전체에서 빨간색만을 인식하오. 다른 현실, 다른 역사는 아주 조금 다른 색조, 아주 약간 상이한 빨간색일 뿐이지만 그 차이만으로 그대는 그 현실들을 적어도 항상은 인식하지 못하오. 그대는 굉장히 엄밀한 색깔을 띠는 여과지에 속하며, 각개 색깔을 각자가 인식하는 바는 모두 다르오. 그러나 역사들은, 가능성의 바림은 이미 그대가 가까이하기 어려울지언정 다른 색깔에 이르기보다 무한히 더 용이하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이해가 안 됩니다. 저희 땅에서는 하얀 빛 위에다 빨간 여과지를 겹쳐 놓으면 오직 빨간빛만이 보이고 다른 빛은 여과지에 가로막힙니다. 그런 것을 말씀하십니까? 가로막는 것을 뜻합니까?

SAI-001: 옳게 보았소. 이 여과지는 내 추종자가 몽환시라 부르는 것의 결과물이오. 몽환시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창조의 과정이오. 몽환시가 다하면 모든 이들이 참으로 깨어나 모두 모여 하얀 스펙트럼을 이룰 것이오. 이것이 대개벽이오. 무지개의 모든 색깔이 한데 뭉치며 여과지가 쇠락할 것이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알겠습니다. 대개벽, 세상의 종말이라. 그 "깨어남"이 혹시 언제 일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전지전능합니까?

SAI-001: 또 미묘한 질문이로군. 원리만 따지면 그렇소만, 나 또한 한정된 시야 안에서 앎을 배울 뿐이며 또 전체 그림만을 보고 현재 상황을 알지는 못하오. 정확히 그대의 세계만을 집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면 매우 정밀하게 눈을 좁혀야만 하오.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여과지를 초월한 데 있소. 하얀 스펙트럼에 걸쳐져 있으며 이름도 거기서 나왔소. 그 때문에 나는 색깔을 섞고 내 뜻대로 여과지를 높이고 낮출 수 있소.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보는, 내가 특이체를 내리는 모습이오. 그대들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는 색깔을 덧칠하는 것이오.

안트로프사리모브: 잘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당신이 종말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까? 당신이 창조자입니까? 다른 신이 또 있습니까?

SAI-001: 말씀드리기... 까다롭소만?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시오. 내게는 홀로 됨도 없고 다른 이도 없소. 이런 대화마저도 나에게는 나누기 버겁소. 그대가 보기에 나는 홀로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생각하지 않소. 나는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동시에 그대의 색조에 집중을 기울여야 하오. 이 세계를 가공하는 데 나는 막대한 심혈을 기울였소. 그대의 색조는 매우 중요하며 그대의 세계는 매우 좋은 위치를 잡았오. 나는 그 과업을 매조지는 데 도움이 필요하여 와귈을 창조했소. 그대가 내 아들딸이나 내 붓이라 일컫는 이 와귈은 오로지 그대의 색깔에, 또는 오로지 다른 색깔에 존재하오. 이들은 나를 도와 물질을 빚고 인간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다했소.

안트로프사리모브: 제가 알아듣기로 지금 인류를 교육한다, 그 교육자는 당신... 아니면 당신의 아들딸이라 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당신은 무엇을 얻습니까? 당신 같은 막대한 생명체가 세계 하나에, 혹은 역사 고작 몇 개에 손을 뻗쳐서 당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SAI-001: 와귈(Wagyl)이란 말은 차라리 붓이나 도구란 뜻으로 번역해야 나을 것이오. 구태여 뜻을 상상하려 하지 마시오. 이렇게 하면 필경 그대가 내 관심하를 더 잘 깨달을 테고, 그대는 아연실색할 것이오. 그대의 색깔은 매우 흥미로우며 매우 좋은 위치를 잡았오.

안트로프사리모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SAI-001: 색들의 스펙트럼은 팔레트와 같소. 팔레트가 있으면 캔버스 또한 있는 법. 내게는 일종의 미학관이 있소. 이 미학관은 그대를 초월하며, 그대와 다른 모든 의식 띤 이는 여과지의 포로라오.

안트로프사리모브: 다... 당신이 특이체를 만드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입니까?

SAI-001: 꽤나 협소한 표현이오. 내가 말하는 것은 웅대한 아름다움이자 우주의 미학이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하오. 색깔은 단지 현실을 비유하는 개념일 뿐이라고 다시 말하오. 내 층위에서... 꿈이라는 것은... 장엄하오. 아직 이뤄나가야 하나 지금도 장엄하오.

안트로프사리모브: 그러나 왜죠? 사람이 특이체 때문에 죽는다고요! 논밭이 휩쓸리고 마을이 박살나잖아요! 그리고...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 저희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당신이 특이체를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서 중요한 사람의 손에 붙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어떤 쓸모가 있어서 특이체가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SAI-001: 내 예술은 이루 말하지 못할 만큼 교묘하오. 단언하겠소만 어떤 색깔을 어떻게 덧칠하더라도 만천하에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소. 필연적으로 선명하고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으며, 어디에 겹치더라도 주변과 어울리고 형태도 정확히 맞아들며, 물을 너무 많이 넣은 수채화마냥 빠르게 번지지 않고...

안트로프사리모브: 당신이... 역사적 인물이나 모든 문명을... 이 세상 중요한 것들을 붓놀림에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SAI-001: 은유적 의미로? 그렇소. 특히 이 섬은 그대의 색깔을 퍼뜨리기 가장 좋은, 미학에 알맞은 장소라오. 가시성을 다른 곳이 따라잡지 못하오. 나는 수많은 색깔들을 모아 들고 있소. 내가 원하는 대로 색깔이 섞인 모습을 유지하고자 그 색깔들을 최대한 고립시켜 두었으며, 울루루를 세워 물질에게 마무리 손질을 맡겼소. 내 관점에서 누벨올랑드는 진실로 환각 속 프랙탈과 같소. 가장 아름다운 효과지. 그러나 특이체가 그대의 층위에서 유형의 쓸모를 띤다면 그걸로도 좋소.

안트로프사리모브: 사람이 죽는다니까요!

SAI-001: 아니오. 물론 맞는 말이오. 그대의 층위에서. 그러나 대전체의 눈에 전체는 전체일 뿐이오. 말씀드리겠소만 애초에 당신의 색조 속에서만 따져도 이미 수많은 당신이 존재하오. 하물며 다른 색깔의 당신이 얼마나 존재할지 상상해 보시오. 당신은 자신이 무슨 존재인지 정확히 모르오. 단 한 가지 실마리도 얻지 못했소. 다이아몬드의 한 면을 보았다고 보석의 전체 생김새를 깨우칠 수 있소?

안트로프사리모브: 그래도... 그...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습니까!

SAI-001: 그대의 생각을 굳이 억누르려 하지 않겠소, 친구여. 나는 몇 겁 동안이나 이 과업을 다해왔고, 여태까지 인간들은 내 뜻을 세심하게 헤아리며 내가 주는 선물을 쾌히 받아들였소. 하니, 내 부탁을 하나 들어서 쓸모를 얻어가시겠소?

안트로프사리모브: 저... 저...

SAI-001: 아직도 나와 함께 있소? 그렇게 희망하오, 여하간 똑같은 정신 속에 우리가 있으니.

안트로프사리모브: 대... 대체 무슨...

SAI-001: 말씀드리겠소. 그대의 세상에 특별한 덧칠을 하나 더할까 하오. 그대의 프랑스 혁명이라는 폭거 때문에 파헤쳐진 심연을 메우기 위해서이지. 그대를 동요시키고 싶지 않소만, 프랑스 제국의 미래는 그다지 유망하지 못하오. 반면에 앵글로색슨의 위세는 꽤나 찬란하게 빛나려 하고 있소.

안트로프사리모브: [대답 없음]

SAI-001: 하여 특이체 하나를 보내 때를 기다렸다 영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게 할 작정이오. 이거 어조가 자못 까다롭군. 그대를 미리 놀래켜버리고 싶지 않았소만 심부름꾼 하나를 마련하면 내 이상에 걸맞소. 깨어나는 대로 그대의 도당을 배반해 내 특이체를 영국 국왕에게 전달해주지 않겠소?

안트로프사리모브: [대답 없음]

SAI-001: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안트로프사리모브: [대답 없음]

SAI-001: [대답 없음]

안트로프사리모브: [대답 없음]

SAI-001: 친구여?